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20 사건 (문단 편집) === 백만웅사의 봉기 === 7월 19일 오전, 셰푸즈와 왕리가 노동자 총사령부의 거점인 우한 수리전력 학원을 찾아가 부상당한 조반파 홍위병들을 위문하였다. 이어 왕리는 조반파 홍위병들을 '강철대오의 무산계급 혁명파'라고 칭송하며 "당신들은 억압을 받고 있다. 타격을 받은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바꿔야 한다. (...) 군구가 내건 좌파 지지의 큰 방향이 틀렸다. 노동차 총사령부에 대한 억울한 조처를 바로 잡아야 한다. 조반파는 혁명좌파다. 백만웅사는 보수조직이다."라고 선동했다. 이에 조반파들은 왕리의 연설을 녹음하여 확성기를 탑재한 차를 타고 시내 곳곳에서 틀어댔다. 때마침 천짜이다오가 자아비판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만웅사의 조직원들은 격노하여 왕리를 성토하는 대자보를 거리 곳곳에 붙히고 타도대회를 열었다. 7월 19일 밤, 백만웅사는 셰푸즈와 왕리를 사로잡기 위해 모여들었다. 7월 20일로 넘어가는 새벽, 백만웅사 대표 200여명이 왕리가 투숙하고 있는 동호빈관 백화 2호로 몰려가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천짜이다오와 셰푸즈가 나와 이들에게 다음날 오후에 만나주겠다고 설득했지만 이들이 돌아가려는 순간 다른 백만웅사 조직원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흥분하여 사령관 천짜이다오마저 구타하고 방안으로 난입하여 방안에 숨어있던 왕리를 끌어내 백만웅사의 사령부로 끌고 간 다음에 다리가 부러질때까지 폭행했다. 당시 마오쩌둥도 동호빈관에 있었으나 마오쩌둥의 우한 방문은 극비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백만웅사는 자신들이 마오쩌둥이 있는 곳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사태를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즉각 천짜이다오에게 왕리를 데려오도록 지시했고 천짜이다오가 왕리를 구출하여 동호빈관에 데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베이징의 장칭과 린뱌오는 이 사건이 [[2월 역류]]를 통해 반기를 들었던 군 원로들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이들은 호들갑을 떨며 연명으로 "우한의 형세가 좋지 않다. 마오 주석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빨리 이동해야 한다."고 독촉했고 린뱌오의 심복인 중앙군사위원회 총병참부 부장 구회작이 우한에 내려가 마오쩌둥에게 린뱌오와 장칭의 편지를 전달했다. 저우언라이 역시 다시 우한으로 내려갔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위험을 과장했다는 것을 알고 화를 내긴 했으나 천짜이다오가 자신에 반대하는 정변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에 천짜이다오에게 왕리를 우한에서 베이징으로 돌려보낼 것을 지시한 후 저우언라이와 의논한 후 공군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상하이로 피신했다. 마오쩌둥이 떠난 후 우한은 다리가 폐쇄되고 통신이 차단됐으며 전략적 요충지와 공항이 군에 의해 점령되어 무법천지가 되었다. 백만웅사는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조반파를 사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